
혹시 패티김을 단순히 ‘아리랑을 부른 국민 디바’로만 기억하셨나요?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무대 위 화려한 노래만큼이나 자존심과 치열한 승부가 가득했습니다.

패티김은 1956년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를 통해 처음 대중 앞에 섰고, 1958년 미 제8군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패티김’이라는 예명에는 미국의 유명 가수 패티 페이지처럼 세계적인 무대에 서고 싶은 꿈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바람대로 한국 여자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밟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한국 가수가 공식 초청돼 NHK 무대에 섰는데, 당시 일본 측에서 기모노를 선물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한복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일화는 유명합니다. “나는 한국 가수니까요.” 이 짧은 말에는 자존심과 사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커리어에는 늘 비교와 오해가 따라다녔습니다. 트로트 가수 이미자와는 장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달랐지만, 언제나 ‘라이벌’로 묶였습니다. 작곡가 임석호는 당시 음반사가 패티김을 스카웃하기 위해 “이미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고, 패티김은 듣자마자 “이미자랑 같은 급이면 안 하겠다”고 단칼에 거절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두 디바를 같은 무대에 세우려던 방송국은 서로에게 ‘첫 순서’를 적은 큐시트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무대에 서면, 다른 한 사람은 그대로 돌아갔다는 일화는 긴장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오히려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패티김은 나중에 “나는 그저 대중 가수였고, 이미자는 모두가 열광했던 국민 가수였다”고 솔직히 밝혔습니다.

이런 냉철함과 겸손이 있었기에, 패티김은 55년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만한 가수는 없었다’고 회자합니다. 최근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후배 가수들과 노래를 나누며 건재함을 보여줬고, 아이유의 앨범에 참여하며 여전히 음악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비교와 경쟁 앞에서 흔들린 적이 있으신가요? 패티김의 이야기는 자존심이 오히려 더 큰 길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