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에서 시작된 연기 인생, 20년 무명의 시간”
곽도원은 1973년생으로 1992년 창극배우로 첫 데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무작정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무대 뒤 청소와 조명, 선배들의 연기를 어깨너머로 배우며
극단 생활을 견뎌야 했다.
1년에 200만 원 남짓의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어머니의 병환과 아버지의 치매 등 가족의 아픔까지 겹치며
연기를 포기할까 고민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14년이 넘는 극단 생활과 무명 시절을 묵묵히 견뎠다.

“IMF와 극한의 가난, 라면 4등분의 눈물”
IMF 외환위기 시절, 곽도원은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서울 인력사무소가 대부분 문을 닫아
하루 일당 2만 5천 원짜리 막노동을 하기도 했지만
소개비 5천 원을 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만 7천 원뿐이었다.
이 돈으로 일주일을 버티기 위해
라면 한 개를 4등분해 하루 네 끼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막노동 현장에서 몰래 밥을 챙겨와 겨울엔 얼어붙은 밥을 녹여 먹기도 했다.
나흘간 굶은 적도 있을 만큼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이어졌다.

“포기하지 않은 이유, 연기에 대한 갈증”
가난과 가족의 아픔, 무명이라는 현실에도
곽도원은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때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해
연기를 그만두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조명 아르바이트, 단편영화 출연,
그리고 연기 워크숍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연기를 이어갔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연기밖에 없었다”는
곽도원의 고백이 그 시절을 대변한다.

“단역에서 주연까지, 빛을 본 순간들”
2003년부터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에서
조연과 단역으로 조금씩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0년 영화 ‘황해’, 2012년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베를린’, ‘변호인’, ‘곡성’, ‘아수라’, ‘강철비’, ‘남산의 부장들’ 등
한국 영화사에 남을 굵직한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특히 2016년 ‘곡성’은 국내외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으며
곽도원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최민식과의 인연, 그리고 성장”
곽도원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롤모델로
배우 최민식을 꼽는다.
‘범죄와의 전쟁’ 출연 당시
최민식은 곽도원의 캐스팅을 반대했지만
첫 촬영 이후 “많이 배웠다”며
곽도원을 인정했다는 일화는
곽도원에게 큰 힘이 됐다.

“지금의 곽도원, 그리고 앞으로”
이제 곽도원은
시대극, 코미디, 액션, 스릴러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연기력으로
대한민국 대표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드라마 ‘유령’, ‘구필수는 없다’ 등
TV에서도 활약하며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었다.